[523926글 관련] 인산부원군 홍윤성 괴담 팩트 체크+추가 (수정됨)

1. 자기 집 앞에 말을 타고 가면 모두 죽였다?
홍윤성이 공을 믿고 사람을 멋대로 죽이고, 문 밖 냇물에서 말을 씻으면 즉각 사람과 말을 모두 죽였으며, 말을 타고 지나가는 사람은 귀천을 묻지 않고 모조리 죽였다는 일화는 선조~인조 대 문신 박동량이 지은 야사 기재잡기에 나오는 일화입니다.
이는 야사의 기록이지만 "홍윤성이 재화를 늘리는 데 힘써 홍산 농장(鴻山農莊)에 쌓인 곡식은 거만(鋸萬) 이었고, 노복(奴僕)은 세도를 믿고 함부로 방자하여서 조금이라도 어기고 거슬리는 것이 있으면 혹 장살(杖殺)하기도 하였다. (윤성은) 시첩(侍妾)·노복(奴僕)이 조금이라도 어기고 거슬리면 문득 용서하지 않고, 궁검(弓劍)을 쓰기까지 하였다."라고 하였고 "홍윤성(洪允成)의 거칠고 광망(狂妄)한 태도와 교만하고 제 마음대로 날뛰는 형상을 성감(聖鑑)은 통조(洞照)하소서."라고 사헌부에서 탄핵하였으니 이런 야사의 과장을 빼고 봐도 홍윤성은 성정이 흉포한 사람은 맞습니다.
2. 나계문 살인사건의 정황은 무엇인가?
홍윤성의 노비 김돌산(김석을산)이 나계문을 때려죽인 것은 세조실록에 기록된 명백한 정사(正史)입니다. 그러나 살해 이유는 고향 유향소에서 보낸 "노비가 튼실하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실록에 따르면 홍윤성의 권세를 등에 업은 노비 김돌산이 길에서 나계문을 마주쳤을 때, 나계문이 자신을 무례하게 대했다는 이유만으로 엄동설한에 그의 옷을 벗기고 다른 노비들을 불러 무수히 구타하여 비명횡사하게 만든 사건입니다. 김돌산이 나계문의 나무를 모조리 베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홍윤성이 나계문을 직접 구타했다는 건 후대에 덧붙여진 각색입니다. 실록을 보면 홍윤성은 나는 항상 서울에 있었으니 직접 위해를 가한 건 없다고 하고 나계문(羅季文)의 아내 윤덕녕(尹德寧) 역시 홍윤성이 직접 패죽었다는 고발은 하지 않았습니다.
3. 관련자들은 처벌받았는데 홍윤성은 처벌받지 않았는가?
사실입니다. 다른게 있다면 김돌산은 그냥 처형이 아니라 강상죄로 능지처사 당했다는 거 정도? 당시 집의(執義) 이극돈(李克墩, 무오사화로 유명한 그 사람 맞습니다.) 등이 홍윤성을 죄주기를 청했으나, 세조가 "무고(誣告)한 일은 모두 그 아래에 있는 무리들이 한 짓이고, 홍윤성은 아는 것이 아니니, 이런 소절(小節)로써 공신(功臣)에게 죄를 가함은 옳지 않다. 금후로는 다시 말하지 말라." 라고 전교했습니다. 이 일화는 성종 때까지 홍윤성과 관련한 스캔들이 되어 대간의 탄핵을 받았습니다.
4. 홍윤성은 진짜로 숙부를 살해한 패륜을 저질렀는가?
조선 선조 대 문신인 차천로가 쓴 시화, 야담집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에 나오는 일화입니다. 이 야담에 따르면 홍윤성이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있을 때 옛날 홍윤성이 가난하던 시절 돌봐주던 숙부가 청탁을 하니, 홍윤성이 박살내 몰래 묻어 숙모가 온행을 하던 세조에게 하소연 했다고 하며 세조가 크게 노하여 윤성을 벌주려 하였으나, 그의 공이 크므로, 그 자리에서 그의 하인 열 사람을 벌주고 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사실이라면 강상죄라 세조의 용서를 받았더라도 당시 홍윤성의 문제를 고발하고 나계문 사건만으로도 두고두고 이를 갈던 대간이 그냥 넘어갔을리는 없는데 실록에는 관련 기록을 찾지 못했습니다.
5. 홍윤성은 평안도 군량미 30만석을 횡령하고 "니도 조카 죽였잖아" 운운했는가?
홍윤성이 평안도 군량미 30만 석을 횡령했다는 기록은 실록이나 신빙성 있는 문헌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실록에 따르면 홍윤성이 평안도에 간것은 1461년 의주를 침범한 야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조가 평안도 도체찰사로 임명한 것인데, 정말로 이 당시 30만석이나 횡령했으면 당시 국방의 중대사이므로 세조가 가만히 있었을리가 없습니다.
특히 술자리에서 세조가 꾸짖자 "주상께서는 조카(단종)를 죽이시지 않았습니까"라고 대들었다는 일화는 한국고전종합DB에서 홍윤성의 각종 악행을 고발하는 문헌에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안하무인인 권신이라 하더라도 왕의 가장 치명적인 역린(단종 살해)을 대놓고 건드리는 것은 삼족이 멸해질 역모죄에 해당합니다. 이는 현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극적인 재미를 위해 창작된 거짓입니다.
6. 홍윤성은 발 씻는 사람을 패 죽이고 판서와 부사직의 아내까지 때려죽였는가?
이 항목은 3가지 일화가 짜깁기된 왜곡입니다.
첫째, 기재잡기에 따르면 홍윤성이 죽인 것은 발을 씻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집 앞 냇가에서 말을 씻기던 사람(과 그 말)입니다.
둘째, 전 판서의 아내를 때려죽인 것은 태종 때의 공신 장사정이 저지른 일입니다.
셋째, 부사직의 아내(첩)를 빼앗으려다 때려죽인 것은 역시 태종 때의 공신 아들인 박실이 저지른 일입니다.
인터넷 작성자가 조선 시대 다른 공신들의 악행을 모두 홍윤성이 한 짓으로 뭉뚱그려 합쳐놓은 것입니다. 장사정이라는 인물이 남궁서 아내의 귀를 자른 다음 패죽이고 이웃들이 이를 항의하자 임산부 포함 대여섯을 구타했지만 태종은 '공신'이라서 의례적으로 유배갔다고 곧 복직시켰고, 공신 박자안의 아들 박실이 윤하라는 인물의 첩을 보쌈했다가 걸려서 뺏겼는데 이에 앙심을 품고 그 윤하의 본처를 때려 죽이자 공신의 자식은 벌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태종은 민씨 처남들처럼 직접적으로 본인의 왕권을 침해하지 않는 이상에야 공신이나 그 자식들은 무슨 사고를 쳐도 대단히 관대했습니다. 장사정과 박실의 일화는 모두 태종실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7. 홍윤성은 무고한 노파를 때려 죽이고 강탈했는가?
이 역시 기재잡기에 나오는 일화입니다. 다만 본문과 달리 해당 기록에는 노파를 거꾸로 매달아서 때려 죽인게 아니라 '바위 위에 엎어놓고 모난 돌로 쳐서 죽이고는 그 시체를 길 가에 두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8. 홍윤성은 애먼 사람에게 바둑돌을 먹였는가?
조선 전기 문신 이육(李陸, 1438~1498)이 엮은 필기집, 우스개 야담 골계문집인 청파극담(靑坡劇談)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해당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홍인산 부원군(洪仁山府院君, 홍윤성)은 성질이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부귀한 수상(首相)이 되었으나 채소를 심고 재물을 늘리는 것에 정신을 쓰지 않은 적이 없으니 베틀을 거두고 아욱을 뽑는[去織拔葵] 것으로 본다면 부끄러운 일이나 일은 아니하고 빈들빈들 노는 것에 비하면 오히려 낫다고 하였다. 일찍이 길에서 두 백성이 바둑 두는 것을 보고 공은 말에서 내려 묻기를, “이것이 무엇 하는 것이냐. 여기서 옷이 나오며 밥이 나오느냐. 너희 같은 사람들은 마땅히 밤낮으로 부지런히 일하여 자기 힘으로 살아야 하는데, 어찌하여 이런 쓸데없는 짓은 하는가. 너희들은 이것으로 먹을 수 있기 때문이겠지.” 하고는 그 바둑을 다 먹게 하였다.
9. 홍윤성은 길가의 사족 부녀를 강탈했는가?
아내[妻] 남씨(南氏)에게 자식이 없어서 같은 고을의 사족(士族) 김자모(金自謀)의 딸을 강제로 취하여 장가들었다. - 성종실록 홍윤성 졸기
해당 일화는 성종실록에 나온 일화를 후대의 야사집 기재잡기가 양주에 공무로 갔다가 사족의 부녀를 겁박했다며 내용을 확장한 것입니다. 김씨를 첩을 볼 것이냐 후처로 볼 것이냐는 당대부터 대단히 논란이 많았던 거 같은데요. 성종은 김씨를 첩으로 삼자는 신료들의 청을 모두 거부해서 후처로 결론이 난 것으로 보입니다.
+ 추가: 성종실록에 따르면 이 후취 김씨 사건은 야사와는 달리 실제론 다음과 같습니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홍윤성의 농장(農莊)이 홍산(鴻山)에 있었는데, 근방에 대족(大族) 김생(金生)이란 자가 있어 홍윤성과 본디 서로 좋게 지내었다. 김생에게는 나이 장성한 딸이 있었는데, 집이 매우 가난하여 시집을 보내려 해도 보내지 못한 것이 여러 해이었다. 홍윤성이 그 미색(美色)임을 듣고 김생에게 속여 말하기를, ‘듣건대 그대에게 나이 장성한 처녀가 있다 하니, 내가 그대를 위하여 사위를 고르려고 한다. 혼수[禮需]는 내가 마땅히 마련하겠다.’ 하니, 김생이 기뻐하며 사례(謝禮)하였다. 홍윤성이 많은 포백(布帛)과 미곡(米穀)을 가지고 실어 보내어 몸차림을 든든히 하게 하고는, 또 글로 속여 말하기를, ‘그대는 이미 좋은 사위를 얻게 되었다.’ 하므로, 김생이 이를 믿고 약속과 같이 때가 되기를 기다렸는데, 홍윤성이 스스로 가서 장가를 드니, 곧 김씨(金氏)였다."
부녀자 납치가 아니라, 결혼 사기였군요.
10. 홍윤성은 세조 사후 예종, 성종 대에도 부원군(인산부원군)과 좌리공신에 오르며, 1475년(성종 6년) 만 50세의 나이로 병사한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아직 죽을 때가 아니다"라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는 묘사는 홍윤성을 까는 실록 졸기, 야사, 야담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역시 홍윤성이 마땅한 응보를 받지 않았다면서 현대에 지어낸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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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홍윤성이 사람을 많이 죽였다는 얘기는 기재잡기와 거기서 많이 내용을 따온 연려실기술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다른 쪽에서는 주로 홍윤성의 오만방자함이나 사치가 강조됩니다.

